외국에 살거나, 외국학교에 다니면 언어가 늘까?
학부시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신 교수님이 영어를 너무 더듬거리면서 하시길래 마음속으로 뭐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일 년 간 캐나다 워홀을 다녀왔다는 선배가 영어로 수업받는 걸 어려워하길래 일 년 간 영어권에 살다왔는데 왜 그러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오늘로 프랑스에 온 지 딱 1년 하고도 6개월이 된다. 그런 망언을 지껄였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딱콩을 아주 세게 때려주고 싶다.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돼가는 데 나의 언어 실력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부끄럽지만 단언할 수 있다(?). 그래, 그렇다면 나름 다국적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데 영어는 늘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오산이다(?). 오히려 영어랑 불어랑 한국어가 섞여서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다.
물론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쓰기와 읽기는 조금씩이라도 차근차근 늘게 된다. 그러나 말하기와 듣기는 처음 수업 때나 지금이나 별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대신 언어가 아니라 다른 게 크게 늘었다. 눈치와 철판.
먼저 눈치가 엄청 늘었다. 대충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은, 혹은 잡담을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류를 읽어내는 눈치가 늘었다.. 그리고 철판이 엄청나게 두꺼워졌다. 첫 학기 때는 내 부족한 언어 실력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었다. 읽기나 쓰기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들여 해결이 가능하지만, 말하기와 듣기는 당장 닥친 순간에 마주해야 하는 문제라 내 언어적 부족함을 들킬까 봐 두려웠다.
마음속으로는 나는 외국인이다, 부족한 게 당연하다, 어버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수십 번 생각해도 내가 바보같이 보이는 게 너무너무 싫고 짜증 나고 무서웠다. 그래서 참 식은땀도 많이 흘렸다.
2학기가 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라기보다 내려놓게 되었다. 철판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엉망진창으로 말해도 원어민이니까 찰떡같이 알아듣겠지 한다. 못 알아듣는 부분이 생겨도 너무 충격받거나 스트레스 받아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이렇게 하니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이 더 잘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언어' 자체에 집중을 해서 최적의 단어를 고르고, 완벽한 어법의 문장을 만드는 데 고심하느라 말할 기회를 놓친 적이 엄청 많았다. 그런 욕심을 내려놓고 나니 요새는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어떤 방식이든 내용을 전하려고 한다. 상대가 이해를 못하면 몇 번이고 더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쪼개 말하려고 한다. 물론 여전히 수업시간에 토론에 끼어드는 건 잘 못하겠지만.
언어가 그렇게 쉽게 느는 게 아니라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원래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언어를 체화하는 일은. 외국에 산다고 해서, 심지어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언어가 매일매일 느는 기적 같은 일은 아마 경험하기 어려울 거다.
외국에 살아도 본인이 열심히 익히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크게 언어 실력이 늘기는 힘들다. 장점도 있긴 있다. 매일매일 언어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원어민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렸다는 점.
흔히 언어를 잘하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말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공감한다. 나처럼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내향형 인간이라면,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라고 조언해줘도 전혀 소용이 없다. 막상 말을 할 타이밍이 오면 그때부터 완벽하게 언어를 조합하려고 미친 듯이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프로세스는 한국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도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보다 머릿속에서 언어를 골라서 말하는 편이었다. 다만 한국어는 그 속도가 빨라서 잘 알아채지 못했을 뿐. 외국어로 말할 때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떠 다니는 데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면 턱턱 막히는 이유가 이 프로세스랑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외향형 인간보다 외국어 말하기를 배우는 게 더디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고 언어를 내뱉으려면 직접 겪어보고, 마음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 문법적, 내용적으로 완성도 높은 문장을 내뱉기엔 아직 이 새로운 언어에 대한 기초가 부족하다는 것을 수십 번 겪어보고, 스스로와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향형 사람들은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붙기 시작할 거다.
나도 외국에 나와서 1년 반 동안 언어에 고통받다 보니 이제야 드디어 철판을 깔고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언어 참 어렵다. 자신감을 갖는 일은 더 어렵다. 그 어려운 과정을 손쉽게 얻으려고 하지 말자. 원래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시간도 많이 들이고 공도 많이 들이자. 그래야만 그 어려운 일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잘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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