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학들은 석사로 입학하면 2년코스로 한번에 입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석사 1년차(M1)와 석사 2년차(M2) 입학을 별도로 진행한다. 따라서 석사 1년차에 일정 학점 이상을 취득하지 못하거나 논문심사에 통과하지 못하면 석사 2년차에 입학하지 못한다. 또한 A학교에서 석사 1년차를 졸업했지만, 석사 2년차는 B학교에서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시스템 때문에 석사 1년차부터 졸업논문을 진행해야 한다. 9월 입학해서 이듬해 6월 초까지 논문을 제출해야하니 사실상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 100페이지 가량의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논문을 써 본 연구자들이라면 아마 이 같은 논문일정이 연구내용의 깊이보다는 연구자로서의 자세를 평가하기 위한 과정임을 단번에 파악했을 지도 모르겠다. 연구주제를 잡아본 적도 없는 석사 1년차 학생들이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논문이라고 부를 만한 긴 호흡의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러니 이 1년차 논문은 이 학생이 연구자로서의 기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평가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처음에는 이런 노하우가 없어서 프랑스 석사과정은 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것을 요구한다고 분개했다. 2년을 수학하고도 쓸까 말까한 논문을 연구의 '연'자도 모르는 학생들한테 대뜸 써내라고 하다니. 말도 안된다 이건. 이렇게 생각했다. 특히나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제3외국어로 써야하는 나는 한참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러나 일단 뭐든 시작하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되긴 되더라.
논문을 제출하고 디펜스를 끝마친 이 시점에서 지난 과정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다고 본다. 일단 어떤 주제든 잡아보고, 일단 관련 논문을 몇 편이라도 읽어보고, 일단 첫 문장이라도 쓰고 나니, 언젠가는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완결된 글이 나오더라.
이 시작이 제일 어려웠다. 논문을 쓰기에는 논문 리뷰가 부족한 것 같고, 방법론이 완벽하지 않은 것 같고, 수집한 데이터가 좀 모자란 것 같고, 불어실력이 부족한 것 같고(응? 그럼 어떻게 쓰려고..?) 등등 '아직'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이 기분을 떨쳐내고 첫 문장이라도 써보는 게 논문을 쓰는 첫걸음이었다. 첫 문장을 쓰고나니 그 다음 문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또 그 다음 문장을 쓰고 나니 또 다음번의 문장을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아주 작은 문장 문장을 쓰다보니, 엄두조차 나지 않던 논문이 어느샌가 완성되었다.
논문 뿐만이 아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결과를 내야 하는 일이라면 일단 시작이 먼저다. 뭐든 시작에 앞서서는 부족한 점들이 더 크게 보인다. 그 결핍감을 이겨내고 한 걸음이라도 떼보는 게 중요하다. 일단 시작을 해야 수정을 하든 보완을 하든 포기를 하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일단 시작해보면 부족해보이던 점들이 사실 별 문제 아니었을 수도 있고, 하다가 고꾸라져서 생각처럼 좋은 결과가 안 나올수도 있다. 너무 힘들어서 중도포기하게 될 수도 있고, 계획과는 완전 다른 길을 가게될 수도 있다. 시작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끝을 볼 필요도 없다. 뭔가를 엉망으로 했거나 포기했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결과'다. 그러나 시작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기준이 높고, 앞으로에 대한 걱정이 많으며,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나 같은 사람들은 더더욱 시작 앞에서 망설인다. 완벽하고 싶고, 잘하고 싶고, 실수도 실패도 하기 싫으니까. 그러나 논문처럼 내가 필연적으로 마주한 과업들 중에 시작하지 않고 저절로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시작도 전에 완생(完生)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이나 삶이 그런 모양새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찌됐든 반드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
어찌됐든 반드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면 되도록 미루지 않고 일단 시작하고 보자. 아무리 작은 시작이라도 아무것도 안한 것보다는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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