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시점 이야기 입니다)
작년 9월, 석사 2년차를 시작하면서부터 준비해왔던 졸업논문을 이번 달 초에 들어서 제출하고, 며칠 전 디펜스까지 끝냈다.
박사 펀딩을 위한 연구계획서를 준비하면서 논문까지 써내느라 막판에는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박사 지원도 중요하지만 논문이 통과가 되지 않는다면, 겨우 준비한 연구계획서도 아무 의미 없게 되버리니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높은 퀄리티로 해내야 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고 스트레스 받았다.
그래도 제발 제발 포기만 하지말자고 다독이면서 억지로 내 멱살을 잡고 마무리 했다.
유의미한 분석과 결론을 생산해내는 정신작업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육체작업이 더 힘들었다. 나중에는 30분만 앉아있어도 뒷목부터 허리까지 툭치면 우르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작년에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올해는 논문 쓰면서도 하루에 꼭 30분씩은 뛰었는데도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올해는 꼭 사전에 미리미리 써서 힘들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과업들이 들이닥쳐서 결국에는 또 막판까지 미친 사람처럼 써냈다. 그래서 겨우겨우 마감일보다 하루 앞당겨 논문을 제출하고 쓰러지듯 내리 24시간 잠만 잤다.
딱 하루를 그렇게 쉬고, 5일 내에 박사 연구계획서와 논문요약본 등의 박사펀딩서류를 제출해야 해서 또 그 일에 한참 매달렸다. 두어번 교수랑 핑퐁을 하고 서류를 고쳐서 최종 제출을 하고 나니, 그 뒤로 3일 뒤에 디펜스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때쯤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 와중에 멘탈 잡게 해준 건 슬의생이었다... 슬의생을 배경음악처럼 켜두고 일을 했는데, 굉장히 효과가 있었다. 아니, 이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의사들도 있는데 내가 엄살 부리면 안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움이 됐다.
대망의 디펜스 날, 내가 첫번째 학생으로 디펜스를 시작했다.
피피티도 준비해갔는데 논문을 다 읽어봤으니 PT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여, 그냥 내 연구의 주요 결과, 시사점, 한계, 그리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겪었던 어려운 점들과 해결방법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이어서 심사위원들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형식상의 오류, 그리고 불어 단어의 뉘앙스 등 마이너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또 양적 연구는 너무 기계적인 해석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각 챕터를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는 메이저한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연구샘플의 바이어스를 보려면 일반인구가 아니라 내 연구에서 사용된 샘플과 프로필이 같은 인구를 비교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연구 결과와 해석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했다. 몇가지 사안을 보충해서 저널에 퍼블리싱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놀라서 두번이나 물어봤다. 저널이요? 퍼블리싱하는 그 저널이요?
그제야 심사위원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맞다고, 연구에서 고려해야 할 점들을 여러모로 깊이 생각해본 것 같다고, 잘했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디펜스 합격증을 들고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전날부터 긴장하고 준비하느라 24시간 넘도록 잠을 안자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런 줄도 잊어버리고 학교 앞 카페에서 한참을 앉아서 일기를 쓰고, 복기를 해봤다.
지난 2년간 지겹게 지나다니던 카페였다. Les deux magots 라는 유서 깊은 카페인데, 늘상 지나다니면 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해 에너지 넘치는 곳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항상 가보고 싶었는데, 디펜스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처음으로 나도 그곳에 앉아봤다.
언제든지 가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근데 이제서야 가보다니... 사실을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가는 길에 내 마음은 항상 긴장 투성이었고,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 마음은 항상 천근처럼 무거웠으니까. 이제서야 나도 그 북적거리던 인파들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그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처음 프랑스에 온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3년여간의 시간이 천천히 눈 앞에 흘러간다. 불어로 간단한 인사조차 못하면서 공부하겠노라 이 곳에 발을 들였던 그 순간부터 석사 졸업을 마친 지금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흘렸던 눈물도 참 많다.
부족한 실력으로 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까하던 걱정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에서 졸업을 제 때 할수 있을까로 변하더니, 어느샌가 디펜스를 통과할 수 있을까 하던 어제의 걱정을 거쳐 지금의 졸업까지 왔다.
지나온 기록들에서 묻어나오는 불안과 괴로움을 보면, 그 시간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천천히 성장을 했구나 싶다. 기록을 하길 참 잘했다.
이제 내 유학기의 한 챕터가 끝났다.
오랫동안 유학기를 팔로잉하면서 봐주시던 브런치 독자분들에게 이 유학기의 한 챕터가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석사 그 자체로는 그냥 작은 한 관문이 끝났을 뿐이지만, 비장하게 떠나온 맨 처음의 나와 비교하여 많은 성장을 했다는 게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박사를 결심한 덕에, 두번째 챕터가 또 이어질 지 아니면 이대로 유학기가 마무리가 될 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20대 후반 그 누군가가 직장을 다니며 숱한 고민의 밤을 지나,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이 외국으로 훌훌 떠나,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도 들어가고 졸업까지 했단다, 그러니 이런 삶도 가능한가보더라 그렇게 하나의 재미있는 레퍼런스로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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