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늘 운이 좋았다. 본인도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는 학부시절 학교에서 제공하는 특수한 복수학위과정에 합격해서 운 좋게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또 그는 운 좋게 아이비리그 스펙으로도 합격하기 힘들다는 장학금을 받아 남들은 빚져가며 하는 유학에서 오히려 몇 천 가까운 돈을 모으며 경제적 채비를 하고 있다. 요새 그는 하던 실험에서 우연찮게 전례 없는 발견을 하게 되어 좋은 저널에 투고할 논문을 준비 중이다.
이런 굵직굵직한 일뿐만이 아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그는 늘 운이 좋다. 운 좋게 저렴한 값에 더 큰 방을 구하게 되기도 하고, 운 좋게 중고제품을 후한 값으로 처분하기도 하며, 운 좋게 소규모 학회에서 수상해서 태블릿 PC도 척척 받아온다. 가끔은 세상의 모든 운이 그를 향해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그는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실력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 그러나 실력이라는 커트라인을 넘어서면 실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운의 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들이 종종 생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최후의 경쟁에서 늘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걸까? 그는 어떻게 해서 대체적으로 운이 좋은, 잘 풀리는 인생을 사는 걸까?
그런 그에 비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만큼 결과가 안 나온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래서 결과를 내야 하는 때가 오면 온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진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안 나오니 남들 하는 만큼 중간이라도 가려면 죽어라 노력해야 겨우 따라갈 둥 말 둥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기대한 것 보다 노력을 게을리하는 경우면 심하게 자책하게 된다. (실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괴로워만 하니 더 문제다..)
이게 악순환이 되어 자신에게 요구하는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는 데 반해, 실제 노력하는 수준이 따라가질 못하니 아예 도망치듯 다 놔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는 스스로를 운이 따라주지 않은 사람, 잘 풀리지 않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특히, 옆에서 손대는 것마다 잘 풀리는 남자친구를 보고 있자니 괜한 자격지심이 들어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 적도 있다.
그래서 관찰을 좀 했다. 운이 좋은 그와 운이 안 좋은 나는 어디에서부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일단 말버릇이 다르다. 서두에 말했듯이, 남자친구는 본인이 항상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노력한 것에 비해 운이 잘 따라준다고. 그리고 그건 그의 진심이다. 우선순위는 모르겠다. 그가 운이 좋은 편이라 말하고 다녀서 운이 좋아진 건지, 운이 좋았던 경험들이 많아서 스스로 운이 좋은가 보구나~하고 다니는 건지는. 그와 달리 나는 운이 없는 편이라고 규정지으며 말할 때가 많다. 나는 왜 내가 운이 안 좋은지 털어놓으라 한다면 구구절절 시시콜콜 이야기가 가능한 사람이다.
두 번째로, 걱정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는 걱정이 많은 편이면서도 걱정이 없는 편이다. 왜냐하면 걱정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버린다(!). 그는 걱정이 생기자마자 해결 가능한 방식을 따져보고 행동한다. 그 말은 즉,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운이라는 건 상당 부분 시간과 연관이 있다. 적시에 원하는 결과를 딱 얻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걱정을 하는 데에 써버린다. 걱정이 생기면 한참 그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 댄다. 그러니 운이 들어올 수 있는 대비를 잘하지 못한다.
세 번째로, 결과를 예상하는 방식이 다르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인 결과를 상상하며 재미있어하는 반면, 나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먼저 걱정한다. 그는 무언가가 원하는 바대로 풀렸을 때 자신이 얼마나 즐거워할지, 또 그런 결과가 나오면 뭐가 좋을 지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안되면 어떡하지 하며 불안해한다.
운은 타고 나는 걸까?
그와 나의 차이를 하나하나 짚어보니, 운이라는 게 타고나는 것도 있겠지만 일정 부분 만들어지는 것도 사실이인 것 같다.
그와 나를 곰곰이 관찰해보기 전에는 우리 둘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정적 일진 몰라도, 그 뒤에 다시 힘을 내서 상황을 긍정하려고 노력했었으니까. 그런데 일단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부터가 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운 좋은 사람으로, 잘 풀릴 인생으로 깔고 시작한 반면, 나는 스스로를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 꼬여있는 인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출발점부터 우리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서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다음의 문제였다.
뇌과학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요즘의 자기 계발서들을 보면 하나 같이 프레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인간의 뇌는 본인이든, 타인이든 누군가가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운도 비슷하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할 것인지, 내 인생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가 운마저 결정한다. 실제로 나와 남자친구에게 주어진 운이라는 게 얼마만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운 좋은' 남자친구는 계속해서 운 좋은 일들을 더 크게 인식할 것이고, '운 나쁜' 나는 계속해서 운이 안 좋은 일들을 더 크게 인식하게 될 거라는 거다. 그런 인식의 차이는 작게 보면 일상을, 크게 보면 장래를 결정짓는다.
예전에 정치를 한 지 20년이 넘은 친척 어른께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정치판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배경 좋은 사람도 아닌 운 좋은 사람이라고. 예전엔 그 말이 굉장히 시니컬하게 들렸다. 니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운 좋은 놈은 절대 못 이긴다 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랬던 그 말이 요새는 굉장히 진취적으로 들린다. 돈도 빽도 이길 수 있는 건 태도뿐이다 라는 뜻으로 들린다. 운마저 바꿔놓을 수 있는, 삶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내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대할 것인가. 올해의 나 자신에게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이 문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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