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프랑스 유학기 출간

발표, 면접 울렁증 적응기 (프랑스 박사과정 오디션)

뿌부부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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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석사에서 박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 박사펀딩 면접이 있었다. 면접일자가 결정되고 난 이후부터 나는 매일, 매분, 매초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포기하고 면접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경우의 수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너무 도망치고 싶어서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서 억지로 잠들어버리기도 하고, 왕창 술을 마셔서 그냥 다음 날 멍청하게 하루 종일 누워있기도 했다.

 

난 정말로 발표, 면접을 혐오하고 싫어한다. 정말 피할 수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피하고 싶다. 초중고까지만 해도 늘 앞장서서 손들고 발표하고 연단에 서는 것도 즐겨하던 나였는데, 대학시절 겪었던 트라우마틱한 경험 이후로 10년 가까이 발표 울렁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자신의 트라우마의 시작점을 찾아내고 대면해보면 그 이후로 울렁증이 덜해진다고 하던데 나한텐 전혀 소용없는 조언이었다. 난 내 트라우마가 시작된 그 순간을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대학교 1학년, 80명 가까이 참관하던 대형 교양수업이었는데, 조별 발표를 10분 앞두고 발표를 담당했던 선배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도망을 친 것이다(!). 그러면서 PPT를 만들었던 사람이 그나마 발표 내용을 잘 알지 않겠나며 황급히 발표를 떠넘기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PPT를 만든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발표 울렁증이 없다고 생각했어서, 황당하긴 했지만 즉석으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괜찮다고 생각했건만 발표를 시작하자마자 머리가 갑자기 새하얘지면서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교양 수업 발표내용이 뭐 그렇게 엄청 어려웠겠는가, 굉장히 간단한 내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와 마이크를 쥔 손이 덜덜덜덜 떨리면서 준비했던 PPT의 글씨조차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때 시력이 안 좋기도 했다). 설상가상 그 때 발표했던 연단이 원형의 대강당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났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발표나 면접을 할 때면 늘 목소리가 염소처럼 가늘게 떨리고,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심지어 소규모 토론이라 해도 3명 이상이 넘어가면 그 때부터 목소리가 떨린다. 앉아서 발표를 해도 소용 없었고, 스크립트를 대놓고 읽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화상 미팅으로 스크립트를 바로 띄어놓고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정말로, 도대체, 어떤 방식을 써도 이놈의 발표 울렁증은 극복이 안됐다.

 

발표 울렁증이나 면접 울렁증은 어느 정도 결이 같아서, 나는 취업 당시에도 서류에는 자신이 있어도 면접만 가면 늘상 탈락이었다. 이게 장장 10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 염소러인 내가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불어로, 심지어 10명의 교수진 앞에서, 연구계획서를 발표하고 면접을 봐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왔다... 내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다. 나를 압살시킬 것만 같았다.

 

 

 

 

그래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발표 때 쓰일 PPT를 만들어서 지도교수 두명,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들과 모의 면접을 했다. 그리고 피드백을 받아서 대폭 수정을 하고, 또 한차례 온라인으로 교수들과 모의 면접을 하고 예상 질의응답에 대해서 토론했다. 심지어 지도교수님은 PPT에 쓰일 레퍼런스를 일일이 찾아서 더해줄 뿐만 아니라, 발표에 앞서 "신사 숙녀 여러분, 먼저 저에게 연구계획서를 발표할 큰 기회를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와 같은 시작 멘트, 스크립트 문구 하나하나까지 교정해줬다. 어떤 단어는 PPT에 명시적으로 쓰지 말고 구두로 설명하는 때에만 쓰자고 전략까지 세우셨다.

 

나도 나지만, 내 오디션을 도와주신 교수님들도 정말 제 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셨다. 그래서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열심히 도와주신 교수님들을 봐서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은 던져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스크립트를 암기하고 연습했다. 실제 오디션 당일에 입고 갈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연습을 하고, 주차장에서 큰 소리로 연습도 해보고, 피피티를 보지 않고 연습도 해보고, 누워서도 해보고, 앉아서도 해보고, 거울을 보고도 해보고, 벽을 보고도 해보고, 녹화도 해보고, 피피티 순서를 뒤죽박죽 섞어서도 해봤다. 그냥 할 수 있는 방식은 다 써봤다. 예상질문은 앉으나 서나 떠오르는 대로 답변을 썼다. 그렇게 나온 질의응답 스크립트만 10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렇게 지난 디펜스 때처럼 또 밤을 꼬박 세웠다. 어차피 잠도 안오고 면접도 오전이라 그냥 밤새 연습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 좋다던데, 프랑스는 면접장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감도 안와서 일찍 가서 장소라도 미리 살펴보려고 일단 면접 3시간 전에 갔다. 근데 학교 측에서 Covid 거리두기 때문에 못 들어가게 하더라. 근처 카페에 앉아서 준비한 원고들을 읽고 또 읽었다. 면접 전에 입을 트이는 게 좋다고 하길래, 친구랑 통화도 했다.

 

면접 전에 입을 트는 건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외국어로 하는 발표라면, 발표 전에 스몰 톡이라도 그 언어로 대화를 하는게 확실히 심신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앞서 면접을 기다리는데 행정직원 분이 내 긴장을 풀어주려 그러셨는지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해주신 덕에 불어 말하기에 대한 긴장이 좀 풀렸었다.

 

 

 

 

그리고 드디어 면접이 시작됐다.

 

역시나 내가 이미지 트레이닝 하던 상상 속 모습이랑은 달랐다 (이쯤되면 도대체 뭘 이미지 트레이닝 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면접자인 나를 가운데 두고 ㄷ자 모양으로 교수진이 둘러싸고 있었다. PPT 스크린은 나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글자가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PPT는 심사위원장이 내 손짓 사인에 맞춰서 넘겨줬다 (ㅋㅋ).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과 다를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역시나 이미지 트레이닝은 효과가 없구만 이라고 생각했다. 면접장이 굉장히 크고 거리두기정책으로 심사위원들이 띄엄띄엄 앉아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발표해달라고 했다.

 

준비했던 스크립트는 뒤집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발표를 시작했다. 원고는 보지 않았다. 줄줄줄 토씨하나 빼지 않고 쓰여있는 원고를 보기 시작하면 그대로 읽다가 끝날 것 같아서 그랬다. 그 생각이 맞았다. 연습을 많이 해둔 덕에 어차피 원고가 없어도 PPT 화면의 첫 글자만 봐도 자동적으로 그 페이지에 대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굉장히 큰 목소리로. 염소러들은 이미 호흡이 딸리기 때문에 필시 목소리가 크게 잘 안나온다. 그래서 큰 목소리로 또랑또랑 발표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면접에서는 나도 생각지 못하게 큰 소리를 냈다. 아마 도로변 옆 주차장에서 자동차들과 맞서 악소리로 발표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됐나보다. 그렇게 줄줄줄 외웠더니 입은 자동으로 알아서 말을 하고 있는데, 눈은 심사위원들과 아이컨택을 하고 어떤 말에 공감을 하고 어떤 포인트에 대해 기록을 하는 지 살펴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말 이런 경험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디리리리 말은 하는데, 다른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이래서 발표 잘하는 사람들이 스크립트를 읽지 말라고 했나 싶었다. 심사위원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눈을 마주치니 내 발표 내용에 더 집중 시키고 싶다는 이상하고도 호기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10분 짜리 발표가 끝나자마자 너무너무 웃긴(?) 장면이 발생했다. 교수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마치 초딩 때 학교에서 저요저요! 하던 친구들 같았다. 그 장면이 너무 즐겁고 신기하고 웃겼다. 물론 들어오는 질문은 죄~~다 못알아 들었다. 정말이다. 연구의 객관성(objectivity)을 어떻게 담보할 거냐는 질문에 제 연구의 목적(objective)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접근이 어려워서 다루지 못하는 현상을 연구하는거다 라는 찰진 개소리로 응답했다 (나름 멋져 보이려고 준비한 답변이었다). 답변을 뚱딴지같이 하는데도 계속 질문이 들어오고, 그 들어오는 질문에 또 거지같이 답변하고, 근데도 또 질문이 들어오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헛소리 하는 게 재미있어서 그렇게 질문을 많이들 던지신건가 싶었다.

 

난 이상하게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아, 그때 한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생각나는 경우가 많은데, 후에 나 같이 박사펀딩 면접을 보게 되는 이들을 위해 생각나는 질문을 적어놓겠다 (물론 질문의 논지에 대해 잘못 이해 했을수도 있다).

 

1. 주제가 접근이 어려운 민감한 주제인데 연구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2. 질적 인터뷰에서 무슨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고 어떤 질문들을 던질 것인가?

3. 성폭력 등 주제가 민감한 내용인데 이에 대한 질적 인터뷰 프로토콜이 있는가?

4. 음주는 대마초, 담배, 마약 등 다른 향정신성 물질과도 연관이 깊은데 다른 물질들은 고려하지 않을 것인지?

5.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건강리스크과 실제 역학에서 인정되는 리스크를 어떻게 구분하여 접근할 것인지?

 

이 외에도 몇개 질문이 더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질문도 기억이 안나는데 도대체 내가 답변은 뭐라고 했을까...?

 

어쨌든 선생님 저요저요! 하면서 질문을 던지려는 교수들도 너무 재미있었고, 거기에 엣헴~ 하면서 순서를 정해주는 위원장도 너무 귀여웠고, 그런 질문들에 헛소리로 응대하는 나도 너무 개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면접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난 사실 내 PPT 내용이나 연구계획서가 너무 부족해서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해를 못하면 어떡하나 이런 고민을 많이했는데, 그런 근본적인 질문들은 들어오지 않은 걸 보니 어느 정도 내 연구의 큰 그림에 대해서 이해를 했나보구나 싶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질문이 많이 들어오는 게 내 연구에 관심이 있구나 싶어서 재미가 있었다. 아, 그리고 이번 면접에서 내가 조금 더 덜 긴장했던 게 애초 이 면접에 대해서 내 연구주제에 대해서 조언을 하러 도와주러 온 어벤져스 모임이라고 프레이밍을 했던 덕분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영 못알아 들어도 부담스럽기 보다는 질문이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던 것 같다.

 

어쨌든 이로써 태산 같았던 PT면접이 즐겁게 끝났다. 발표나 면접에 있어서 즐겁다고 생각해보고, 또 큰소리로 또박또박 내 발표자료를 다 이야기 했던 경험이 인생에서 처음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이런 새로운 세계에 눈이 트였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번 면접이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장장 10년을 끌고왔던 트라우마다. 그런 내가 그 트라우마를 깨고 발표가 재밌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면, 그건 3년 박사펀딩보다도 더 귀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이번 한 번으로 내가 발표 울렁증을 극복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발표 '적응기' 정도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땅의 염소러들, 다 너무너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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